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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영<나무>를 읽고.....

등록일03-07-04 조회수90 댓글0

그대는 내게 있어 /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썩어 천년 / 그 긴 세월 함께 하고픈 / 주목(朱木)이었음 싶습니다.

그대는 내게 있어 / 혼자 힘으로는 줄기를 뻗지 못해 / 두 줄기가 서로 약한 부분을 이끌어주며 / 그 결실로 곱고 아름다운 꽃 다소곳이 피우는 / 등(藤)나무이었음 좋겠습니다. / 어우러진 채 끊임없이 서로를 타고 오르는…

그대는 내게 있어 / 최소한 오백 년 이상의 시간을 걸쳐 / 고작 그 직경이 한 뼘 정도 되는 / 그렇게 더디 자란 만큼 조직이 치밀하고 균일해져 / 그 어떤 충격에도 뒤틀림 없는 / 사랑하는 사람의 그 이름 석자 새겨놓은 도장나무, / 회양목이었음 싶습니다. /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사랑하는…

그대는 내게 있어 / 노간주나무입니다. / 척박한 바위 틈 그대 먼저 둥지 틀고 / 불쑥 이방인처럼 찾아든 내게 / 당신의 쉴 곳 내어주며 함께 뿌리내릴 줄 아는 /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찾아온 거지에게 / 눌은 밥 한 사발이라도 들려보내는 / 그 옛날 어머니 인심처럼 / 넉넉한 마음으로 /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맞아들일 수 있는… / 좀 바보 같으면 어떻습니까? / 좀 손해보면 어떻습니까? / 어차피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닙니까?

그대는 내게 있어 / 초토화된 현장에서 세 번 피고 지는 / 그래야만 비로소 진짜 생명이 시작되는 / 60~120년 만에 피어난 / 대나무꽃이었음 싶습니다. / 지천에 피어난 꽃들이 / 번영과 종족의 기원을 담은 / 화려한 결정체라 하여도 / 우리의 꽃은 죽음과 맞바꾼 아픔이요, 고통이니 / 조금이라도 삶을 연장하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고 / 다음 해를 기약하며 땅 속 줄기를 지키려 들지 않고 / 그만의 푸르름, 그만의 곧음을 간직한 채 / 자신의 삶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그대는 내게 있어 / 오직 일 속, 일 종만 있는 / 외로운 독립수라는 특성 때문에 / 숲을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 한데 어울려 자라지 못한다 하더라도 / 스스로 병충해 막기 위해 독을 키운 게 / 사람들에게는 ‘징코민'이라는, / 혈액순환제로 환원될 수 있는… / 은행나무이었음 좋겠습니다.

그대는 내게 있어 / ‘일지(一枝)'로 외대로 곧게 자라지만 / 절대 흔들리거나 부러지지 않게 적당한 간격으로 무리를 이뤄 / 각종 풍상 이겨내는 / 잣나무이었음 싶습니다. / 더불어 사는 모습은 제 스스로를 더 굵고 강하게 만드는 / 남을 앞지르려 하기보다 손잡고 함께 사는 것이 / 종국엔 스스로를 더 키운다는 것쯤은 / 일상(日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결국 나는 그대의 ‘연리지(連理枝)'이었음 싶습니다. / 땅 아래 뿌리는 둘이면서 / 지상에 나온 부분 그렇게 한 몸 되는 / 한번의 연리지로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는 / 그럼에도 합쳐지기 전의 성격과 기질 고스란히 간직한 채 / 흰 꽃 피웠던 가지엔 흰 꽃이 / 붉은 꽃 피웠던 가지엔 붉은 꽃 피우며 / 한 발자국 물러서서 한 몸 이룰 줄 아는 / 사랑의 지혜이고 싶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또 하나의 ‘연리지(連理枝)'이었음 좋겠습니다. /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빈 여백으로 인해 / 서로가 애틋이 그리워할 수 있는 /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 유지하며 /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주지 않고 /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 /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 / 그래서 서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거리로 /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어린 왕자와 여우의 그 길들임이었음, / 그 관계이었음 좋겠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해거리' 입니다. / 어느 해 열매를 너무 많이 맺고 나면 / 다음 해 어김없이 빈 가지로 / 잎 희생해가며 맺은 열매의 가치는 비교할 게 없을 터, / 열매를 최고의 재산으로 알지만 해 거듭할수록 / 내 안의 자생력 사라지고 / 점차 기력 다하게 될 때 /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무너져 내릴 때 / 스스로 한계 치에 달했을 때 / 한 해 열매맺기를 과감히 포기하여 / 모든 에너지 활동의 속도 늦추면서 / 오로지 재충전하는 데만 온 신경 기울여 휴식을 취합니다. / ‘휴식'은 다른 모든 것 포기하고서라도 얻어야 할 / 삶의 중요한 자양분인 줄 아는, / 그동안 물과 영양분 과도하게 옮기느라 / 망가져 버린 기관들 추스르고 / 헐거워진 뿌리 단단히 엮으며 / 말라비틀어진 가지들 곧추세우렵니다.

내가 그대에게 ‘웃가지'라면 / 과감히 잘라내십시오. / 그대의 뿌리 힘들게 하고 / 그대의 영양분 축내며 / 그대의 수형 망치는 웃가지라면 / 가지치기 해야 할 순간, / 제발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곡지(曲枝)'라면 / 그럼에도 살아남겠다는 / 모진 다짐의 결과물로 보아주십시오. /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자기 삶에 느슨한 법 없는 / 제 가지가 줄기나 어떤 외부적인 영향 때문에 휘는 것, / 그것을 내 투쟁의 흔적으로 여겨 주십시오. /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살아가는 까닭이옵니다.

한 번 뿌리내리면 평생 그 자릴 떠날 수 없는, 그러나 결코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나무. 그 나무는 다름 아닌 ‘그대 그리고 나'입니다. / 그 초연함, 그 한결같음, 그 의연함, 그 마음씀씀이… / 주변 환경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고 힘들어도, 숨이 막힐 지경이라도, 빛을 받기 위해 자기 몸통 틀고, 영양분 부족하면 아랫가지 일부러 떨어뜨려 에너지 비축하며, 눈물겹게 살아가는, 한 그루의 나무는 ‘그대 그리고 나'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바로 그러합니다.





211.104.99.230 눈송이: 나는 나무이기를 꿈꿀때가 참 많습니다.
시골길 국도를 달릴때는 동네 입구에 있는 커다란 정자나무같은 노목으로
늙어가고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성한 잎사귀 출렁거리며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기도하고
땅 깊은속에 뿌리 쭉쭉 뻗어내리는 나무이고싶다고요.
읽어보고싶은 책이네요.나무...즐감하였습니다.건필하세요. [07/04-15:58]
218.147.51.129 왕건: 당신이 뿌리면 나는 그 뿌리에 영양을 공급하는 거름이 되어드리리다. ㅎㅎㅎ [07/04-17:52]
61.255.146.236 현우: 그대가 황지니라면 난 서경덕이 될라요 [07/04-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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