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삼십대에는 나도 혈기왕성한 젊음을 과시했다.
주말에 집에서 할일없이 빈둥거릴 때 목은 출출한데
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고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목을 쭈욱 빼서는 누가 이사를 가지나 않나 훑어 본다.
아파트 빌딩숲에서 주말이면 이삿짐을 내리고 올리는
광경이 자주 눈이 띈다 그러면 앞면이 빨갛게 코팅이 된
면장갑을 끼고 목에 수건을 걸치고 간단한 운동복을 입으면
이삿짐센타의 인부 왔다자다 원래 말빨이라면 왕건이라..
주인장과 통성명을 하고 무거운 물건부터 후딱후탁 옮겨
버린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형이라 조금만 일을 하면 흥건하게
땀이 옷을 젖힌다. 크다란 냉장고를 혼자서 울러매고 계단을
오르면 아지매들은 탄복을 한다.
땀이 비오듯 뚜덕뚜덕 떨어지제.. 남의 눈에 잘 띄는 부피크고
무거운 짐을 날랐으니 이사하는 집 주인이나 도와주러 온 사람들
사이에 친한 이웃처럼 가볍게 대하게 된다. 왕건이 농담도 보통은
넘게하제.. 시덥스런 이바구도 종종하제..아지매들 슬쩍 소쿠리
뱅기도 잘 태우제.. 아무튼 그날은 기분도 좋고 힘도 쓰고 술도
공짜로 얼큰하게 많이도 마신다. 젊음의 재미가 그 재미더라..
그때만 해도 직원들이 이삿짐을 옮기면 나를 초청한다.
힘이세다는 소문이 나서 피아노나 냉장고 세탁기를 옮겨
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기도 했다. 어떤 친구는 먼저 이사간다는
소리도 않고 슬그머니 술집에 델고가서 코가 삐뚜러지도록 퍼 먹인
후에 이번 주말에 이사를 가는데 좀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그놈은 나한테 작전을 잘못편거다. 저녁 실컷 먹었다고
내일 아침 안먹어도 되나? 택도없다. 이사 간다는 이야기만 해도
공술 생각이 나서 입이 벙글..코가실룩거릴 왕건인데..
혹시 거들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술을 사 먹인 것 만큼 손해다.
그럼 요즘은 어떤가?
휴일..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다가 아는 사람이 이사를 간다고
시끌벅적하면 주인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슬금슬금 뒷걸을 쳐서
오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와서는 살짜기 현관문을 열고
문을 닫는 순간 호랑이에게 쫓기듯 몸보다 마음이 앞서 도망을
가다가 발이꼬여 앞으로 꼬그라지는 웃지 못할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다 세월이 핥이고 간 상처다. 늙었다는 말이다.
세월앞에 장사없다고 왕건이의 전성시대도 이제 막을 내렸다.
돈이 좋더라.
예전에는 이사를 하려면 이삿짐 센터에 연락을 하여 짐차를
부르고 인부를 사서 고생스럽게 이삿짐을 옮겨야 했지만..
요즘은 마눌이 없어도 똥구렁내나는 돈을 갖고 24시간 편의점에
가서 온갖 음식을 구색따라 갖춰 먹을 수가 있듯이 포장이사를
하면 손 안대고 코풀수도 있더란 말이다.
왕건이 어제 이사를 했다. 마눌이 포장이사를 한다고 헛소리로
한번 슬쩍 떠 봤더니 요렇게 "휴가를 내어야 안 되겠나? 이사를
하는데?" 했더니... 돌아오는 메아리가 가관이다. "있어봐야
걸치기만 하니 회사 나가소" 속으로는 좋았지만 이거 집구석에
걸치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뜰뜨럼 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는 이사를 떠나는 집에서 출근을 했고 퇴근시에는
이사를 한 집으로 가야 하는데.. 깜박잊고 빈집으로 들어갈뻔 했다.
이사를 할 때마다 버려야 하는 것이 많다. 별로 효용가치도 없는
것을 사 놨다가 그냥 집만 복잡게 쳐박아 놓는 물건이 많이 있다.
전문서적도 버리고 영어테이프도 다 버렸다. 이 나이에 언제 공부
할꺼라고 방만 복잡게 갖다 놓는단 말인가 싶어서 잡히는 대로
버려라 했다.
세면장에 들어갔더니 칼 면도기가 없어서 혹시나 싶어 마눌에게
물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버렸단다. 하두 기가차서 질레이트
면도기를 자주 쓰는데 왜 버렸냐니깐.. 당신 쓰는 것 한번도 못 봤는데...
그래서 버렸다나? 이놈의 여편네야!!!! 전기면도기는 깨끗하게
구랫나루까지 다 깍지 못하여 칼면도를 며칠에 한번씩 하는데
우째 그것도 모르고 버렸냐면서.. 쪼께 열이 받혀 뚜껑이 열릴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눌러닫았다.
마눌.. 쓰리파 끌고 현관문을 나가더니 한참 있으니 들어온다.
내 앞에 와서 입을 삐쭉거리면서 "여기 있소" 하면서 면도기를
내 놓는다. 야밤에 들고양이 같이 쓰레기통을 뒤지다니.....
내가 너무했나? 마눌이 너무했나? 갸우뚱~~~갸우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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