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역사
가. 인터넷이 시작되기 전 (pre-internet, 1960-1970s)
1960년대는 미국, 영국 등에서 자국 내의 컴퓨터 네트웍을 구성하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1969년에 미국에서는 ARPANET이 구축되었고, 영국에서는 JANET이 구축되었다.
미국의 ARPANET은 전용회선과 같이 연결되지만 직접적으로는 비 연결되는 가상 회선으로 구성을 전제로 만들기 시작했다. 요구는 당연히 미 국방성에서 요구를 하였다. 이를 CONNECTIONLESS ORIENTED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2개의 노드로서 시작했다.
나. 국내 인터넷의 모형 탄생 - SDN (birth of internet, 1980s)
1982년 3월에 국내 인터넷의 시초가 되는 SDN (System Development Network)이 개통되었다.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의 중형 컴퓨터 PDP 11과 구미의 전자기술연구소(KIET)의 중형컴퓨터 VAX 11/780가 1200bps 전용선으로 연결되었으며, 1983년 1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SDN에 연결됨으로써 통신망으로서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이 SDN에 연결된 컴퓨터들 사이의 통신 프로토콜이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TCP/IP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내 인터넷의 시초라고 하겠다.
SDN은 국내의 컴퓨터들을 연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외 네트웍으로의 연결을 추진하여, UUCP를 사용하여 1983년 8월에 네덜란드의 MCVAX 컴퓨터에 연결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미국의 HP Lab의 컴퓨터에 연결되었다.
UUCP는 UNIX에 설치되어 있는 프로토콜이므로 추가적인 설치 부담이 없다는 장점이 있어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의 네트웍 노드를 확산하는데 있어서도 이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내에 ARPANET에 참여하지 않은 대학 및 연구소들을 연결하는 CSNET이 구성되어 있었다. 1984년 12월에 UUCP를 사용하여 SDN과 CSNET이 연결되었고 1985년에 X.25를 사용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CSNET을 통하여 1990년 정식으로 미국의 인터넷에 연결될 때까지 기술 교류의 장으로서 활용되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의 ARPANET 접속 제한 정책에 의해 FTP 서비스 등은 사용할 수 없었고, 전자 우편 서비스와 USENET의 뉴스 서비스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제선 사용료 부담으로 USENET 자료의 상당량은 온라인보다 우편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1983년 KAIST에서 '한글 Mail System의 개발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고, 한글 전자 우편에 관한 테스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1985년 9월 한글 전자 우편 프로그램과 한글 에디터인 hvi라는 프로그램이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1984년 5월 데이콤의 DACOM-Net을 통해 전자 우편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1983년에 만들어진 네덜란드 (MCVAX), 미국 (HP Lab), 그리고 한국 (KAIST)간의 네트웍을 시초로 하여, 이들이 각각 유럽, 미국, 아시아 지역의 컴퓨터 네트웍의 연결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일본, 한국, 호주, 미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캐나다, 네덜란드 등을 아우르는 국제 네트웍인 ‘AsiaNet’을 구성할 수 있었다.
다. 국제 인터넷과의 연결 (toward international internet connection, early 1980s)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국내 인터넷이 다국적 인터넷에 참여하게 되는 주요한 일련의 사건들이 진행되었다. 1986년 7월에 최초로 IP 주소를 할당 받았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 코드 도메인인 .kr이 공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kr 도메인 네임 서버로 한국과학기술원에 있는 컴퓨터와 NIC의 컴퓨터가 등록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kr을 도메인 네임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들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인터넷이 국내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그 사용 범위가 확장되면서, 국내 인터넷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관장하는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으로 1988년에 대학과 연구소를 주축으로 하는 ‘학술전산망협의회(ANC)’가 구성되었다. 이 협의회는 학술전산망의 대표들과 필요한 위원들이 참여하는 ‘조정위원회 (ANC Steering Committee)’와 네트워크 운영 관련 실무자들이 참여하는 기술위원회인 ‘SG-INET’의 소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이 학술전산망협의회는 국내 인터넷 사회를 대표하는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국내 도메인 이름 및 IP 주소의 사용과 할당을 조정하고, 해외 전산망과의 연결을 조정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 협의회의 국내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그 후 ANC는 1994년에 들어와서 이름이 ‘KNC’로, 1997년에 ‘NIC-Committee’로, 1998년에 ‘인터넷주소위원회 (NNC)’로 변화하면서, 인터넷 정책을 수립하고 제안하는 민간 기구의 활동이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인터넷정보센터(KRNIC)이 출범하면서 도메인에 대한 유료 서비스가 시작되고, 2004년 8월부터 한국인터넷진흥원(NIDA)이 출범하였다. 국가에서도 인터넷주소정책심의위원회와 인터넷주소분쟁조정위원회가 정부의 기구로 역할을 시작하였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통신 서비스를 위한 노력과 더불어, 1980년대에는 또 다른 형태의 통신 방식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PC 통신’이 그것인데, 1986년에 시작된 데이컴의 ‘천리안’과 1988년에 시작된 케텔(KETEL)이 가장 대표적인 PC 통신 서비스이다. PC 통신이 인터넷과 병행하여 존재하는 독립된 서비스로 운용되어 오다가 1995년에 와서는 인터넷 상용망을 이용해 일반 PC사용자들에게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PC 통신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온라인상에서의 ‘동호회’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1989년 미국에서 하와이대학을 중심으로 일본과 호주, 뉴질랜드를 연결하는 PACCOM(Pacific Communications Networking Project)이 기획되었고, 당시 SDN의 멤버 였던 여러 기관들로부터 하와이까지의 56Kbps 1년 전용선비를 공동부담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하나(HANA)라는 기구를 설립했다. 1989년 3월, KAIST의 중형컴퓨터에서 청량리 전화국을 경유하여 인공위성 송수신 센터인 금산지국을 거쳐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 하와이대학을 56Kbps로 전용선으로 연결하는 ‘하나망’이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SDN은 국내망으로 인터넷에 연결된 망을 하나망이라고 부르면서 SDN은 서서히 이름을 잃어가다가 1993년 ANC의 기술위원회에서 SDN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1985년에 국내 최초로 컴퓨터 네트웍 관련 국제 학회 PCCS가 KAIST 주최로 개최되었다. 이러한 컴퓨터 네트웍 관련 국제 학회는 1990년대 초에 가서야 다시 개최되었을 정도로, PCCS는 상당히 기술적으로 선도적인 학회였다. 그리고, 당시의 국제 컴퓨터 네트웍 분야에서의 한국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참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라. 교육계와 연구계를 중심으로 인터넷 확산 (prolification among r&e community, early 1990s)
1983년 7월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계획안이 수립되었고,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서 1986년 5월 12일 법률 제3848호 '전산망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정부는 이 법에 의거하여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과 관련 정책의 심의·조정을 담당하는 전산망조정위원회를 설치하여 정부주도로 국가기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88년 6월에는 국가기간망을 ‘연구전산망’과 ‘교육망’으로 분리하여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연구망은 과학기술처 산하에 있는 시스템공학센터를 중심으로, 그리고, 교육망은 교육부 산하에 있는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각각 구축에 들어갔다. 연구전산망은 KREONet(Korea Research Environment Open Network)으로, 그리고 교육망은 KREN(Korea Research and Education Network)로 현재까지도 주요 대학 및 연구소를 잇는 전산망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2년 ANC 관할 하에 국내의 인터넷을 대상으로 통합된 망 정보 관리 기능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망정보센터(KNIC, Korea Network Information Center)’가 설립되었다. 이전까지 개별 네트워크별로 인터넷에 대한 등록 및 망 정보 관리 기능을 수행하여 왔고 국내의 IP주소 할당을 위한 조정과 도메인 네임 등록 등의 기능을 ANC의 기술위원회를 통해 하였으나, 국내의 인터넷 규모가 커지고 세계적으로도 대륙별, 국가별로 망정보센터를 설치하는 추세에 따라 한국망정보센터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1993년 1월부터 KAIST에서 한국망정보센터를 위탁 운영하다가 1994년 9월에 한국전산원으로 그 주요 기능이 이전되었고, 1999년 6월에 KRNIC이라는 독립된 법인이 만들어지면서 국내 망 정보 관리 기능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에 ‘인터넷주소자원법’에 근거하여 ‘인터넷진흥원’이 만들어져서 국내 인터넷 주소 자원 관리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전자 메일을 위한 기존의 프로그램들은 영문자와 숫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만 메일 내용에 아무런 손상없이 전달될 수 있었고, 한글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메일 내용이 손상되어 수신자가 메일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1991년 12월 KAIST에서 한글을 내용의 손상없이 영문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변환에 관한 '한글 인코딩 규격안(ISO2022-KR)'에 따라 한글 전자메일 프로그램인 '한글elm'을 개발하였다. 이 때 사용된 한글 인코딩 방식을 발전시켜 “Korean Character Encoding for Internet Messages”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인 IETF(The 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의 RFC 문서를 등록하였다.
1990년대에 국제적으로 인터넷에 World Wide Web이라는 혁신적인 인터넷 사용의 기술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와 거의 유사한 시기에 국내에서도 한국과학기술원의 인공지능연구센터에서 국내 첫 웹 사이트를 구축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WWW 기술을 국내에 소개하고 보급하는 연구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하여 국내에 WWW의 보급이 가속화될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인터넷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를 반영하듯 1993년에 제1회 한국학술전산망워크숍(KRNET)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워크숍은 그 후 연 1회로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으며, 국내외 인터넷 관련 기술의 동향을 소개하고 기술 전문가들 간의 기술 교류 및 협력을 도모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마. 상용 인터넷 (commercial internet, mid-1990s)
1990년대 중반에는 대학교와 연구소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인터넷이 일반 회사 및 일반 가정에까지 인터넷이 보급되는 계기들이 만들어졌다. 1994년 6월 한국통신이 KORNET을, 10월 데이콤이 천리안에 DACOM InterNet을, 그리고 11월에 ㈜아이네트기술이 나우콤과 함께 '나우누리'를 통해 '한누리(NURInet)'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상용 인터넷 서비스는 2004년에 이르러 30여 개의 서비스 업체가 참여하는 국내 주요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상용 인터넷들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산원의 인터넷정보센터(KRNIC)을 중심으로 연동될 수 있도록 연동센터가 구축되었다. 우선, 1995년 2월 교육전산망, 연구전산망 등이 연동되었고, 3월 이후 아이네트, 나우콤 등 상용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 (Internet Service Provider, ISP) 11개 기관이 연동되었다. 같은 해 11월, 국내 인터넷 연동 및 운영을 한국전산원/한국통신/데이콤 중심으로 한다는 IX (Internet Exchanger) 체계에 협의하여 1996년 12월까지 상용 ISP는 상용IX (한국통신, 데이콤)으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1999년 6월 국내 주요 ISP사들이 참여하는 한국인터넷연동협의회에서 KINX(Korea Internet Neutral eXchange) 연동센터를 구축하였다.
1995년 3월 중앙일보를 필두로 하여 10월에 조선일보가 ‘디지털조선일보’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종이 인쇄를 동반하는 신문이 아니라 웹 사이트로만 운영되는 ‘웹진(웹메거진의 약자)’이 1996년 9월 아이네트의 '이미지(im@ge)'의 창간을 시작으로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인터파크’와 ‘롯데인터넷백화점’이 개설되면서 상가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웹 사이트에서 물건을 검색하고 구매하는 “e-commerce”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은 국내외적으로 인터넷의 보급이 크게 증가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인터넷의 보급을 더욱 독려하고 더불어 구축된 인터넷을 활용하는 이벤트로서 1996년에 국제적으로 ‘Internet Expo’라는 행사가 인터넷 상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물리적인 전시관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웹 사이트가 전시관의 기능을 하도록 하여, 급격하게 발달하고 있는 WWW 기술과 인터넷 기술을 다양하게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나, 국내에서는 web 기반 서비스를 기획하는 venture들에게 자신들의 기술을 대외적으로 소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대중 언론 매체들의 온라인 참여를 더욱 독려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국내의 공공 기관이 web site를 구축하도록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 초고속 인터넷 (late 1990s)
1990년대 말,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아직 개별 가정으로의 인터넷 보급이 보편화되지 못한 시기에 인터넷 사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버까페’ 혹은 ‘PC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5년 9월 15일, 서울 종로구에서 문을 연 ‘네트(NET)’가 국내 최초의 '사이버 인터넷 까페'이다. 점차적으로 그 수가 증가하면서 1999년 말에는 15,150개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PC 방을 중심으로 온라인 게임의 사용자가 증가하였다. 1998년 미국 블리자드(Blizzard)사에서 개발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PC 방을 중심으로 일반인들에게 애용되었다. 그리고, 청소년 층에서 이러한 온라인 게임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결국 일반 가정에까지 인터넷이 보급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주식 거래 서비스를 사용하면 주식 거래장에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주식 거래를 손쉽게 할 수 있고, 인터넷 뱅킹 서비스를 통해 은행에 직접 가지 않아도 출금, 이체 등의 은행 업무를 편리하게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편리성으로 인터넷 뱅킹의 경우 2001년 11월 현재 전체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1,131만 명의 사용자가 등록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온라인 게임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실생활에서의 필요한 서비스를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곳에서 손쉽게 마칠 수 있으므로, 일반인들의 인터넷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으며 결국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이 짧은 기간 내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사. 사회적인 영향
인터넷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 편리함을 제공함과 동시에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터넷의 특정 서비스 특히나 게임이나 음성적인 정보에 중독되어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늘어나는가 하면, 자살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웹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해킹 등의 방법으로 타인의 정보를 도용하는 범죄가 발생하고, 부적절한 내용의 메일을 무제한적으로 살포하여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하게 하는 스팸 메일, 그리고 메일을 통해 컴퓨터 바이러스를 살포하여 업무를 정지시키는 등의 부정적인 사건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1995년에 정보통신부에서 통신의 부정적인 영향을 방지하고 심의하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인터넷 범죄 수사 센터’, ‘인터넷 중독 예방 상담 센터’, ‘불법 스팸 대응 센터’, ‘인터넷 침해 사고 대응 지원 센터’ 등의 기구들이 정부와 민간의 협력 하에 구성되어 인터넷의 사회적 부정적인 영향에 대처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아. 네티즌
2000년대 사회적으로 인터넷이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네티즌’을 들 수 있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익명성과 접속의 용이성 등으로 인해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인터넷에 다양한 사이트를 개설하고 운영하며, 이 사이트에 다양한 의견들을 개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견 개진은 개인의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중요 이벤트 때마다 주요한 여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붉은악마는 1997년 8월 기존의 국가 대표 서포터스 클럽을 '붉은악마(Red Devil)'로 확정짓고, 2000년 11월 붉은악마 홈페이지를 개설하였으며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응원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또한, 2002년 6월 13일 미군장갑차에 여중생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네티즌의 촛불시위 및 온라인에서의 추모 움직임이 이어졌다.
1999년 국내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노사모)'가 네티즌을 중심으로 생겼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이 노사모를 비롯한 많은 네티즌 그룹이 온/오프라인에서 선거운동을 펼쳤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한 선거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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