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 쓰는 사랑...
눈이 내립니다.
세상에 내리는 눈은 모두 첫눈입니다.
도시의 거대한 빌딩 위로, 달리는 자동차의 창문 위로, 저잣거리 노점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의 전대 위로, 장독대 위로, 마당에 가지만 남은 목련나무 위로,...
눈이 내립니다.
신문 배달원이 던지는 호외처럼 처음에는 한두 송이씩 떨어지던 것이
갑자기 무슨 새로운 소식이 저렇게나 많아진 것일까...?
우르르 우르르
아, 눈 온다!
눈 온다!
수천 수억만 톤의 눈송이들이
하얗게 잊으라고, 하얗게 다시 시작하라고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눈이 내립니다.
모든 역사와 풍경 위에 내리는 눈은 공평합니다.
오천 년 전에도 오천 년 후에도 오직 흰색으로 존재합니다.
모든 풍경 위에 올려진 흰색은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마음만이 분분했고 갈등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풍경은 비단 고난의 역사 위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눈송이만큼이나 많은 추억과 풍경을 그리며 또다시
하루의 첫눈이자 마지막 눈이 내립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는 생의 첫눈이 될 것이고
병상에 누워 숨을 거두는 이에게는 마지막 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은 새로 태어나는 사람에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나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모든 것을 하얗게 잊고 살아온 날들을 묻어두고 다시 시작하는 새 삶으로서의 눈.
눈을 그렇게 바라보고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새로 쓰고 싶은 삶이 있듯이,
이렇게 눈 내리는 날에는 지우고 싶은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을 떠올려
그 부분에 지금의 눈을 내리게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 이마를 묻고
오랜동안 눈내리는 풍경을 바라봅니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눈 쌓인 공터에
'영미야, 사랑해'라고 커다랗게 써 놓고 후다닥 달아납니다.
'영미야, 사랑해' 위로 또 눈이 쌓여 점점 글자들이 흐려집니다.
마치 글자를 쓰고 달아난 남자아이와
아파트 어디선가 그 글을 내려다보고 있을 여자아이의 사랑이 지워지고 잊혀져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될 것처럼,
펑펑 눈이 옵니다.
그 눈이 내리는 풍경 속에 살고 있는 '우리'라는 눈사람들.
빌딩 사이에, 아파트 사이에 그리고 좁은 골목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정이 들다가 점점 녹아 사라져 버릴 눈사람들...
그렇게 이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이 세상에서 녹아가면서 지금
내리는 저 눈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근사하지 않은가요?
공터 마당에 눈을 맞고 서성이던 한 고등학생이 써 놓고 간
사랑이라는 글자가 어느새 내린 눈에 덮여 사라져갑니다.
그 사랑이 덮여진 그 자리, 사랑이 잊혀진 자리로 달려 나가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사랑이여, 눈부신 나날들이여.'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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