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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_세월의 한자락을 접으며

등록일01-12-28 조회수93 댓글0

세월의 한 자락을 접으며
- 차 한잔의 상념 -


또 다시 짧지 않았던 시간의 한 자락을 넘겨 접는 때가 왔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시간이면 의례 그랬듯이 만족보다는 아쉬움과 미련이 더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과거의 일로서 돌이켜 보는 이 때가 되면, 비록 지난 일들 이지만 새롭게 의미를 주며 다가오는 것들이 또 다시 나를 침잠과 상념의 시간으로 잠기게 합니다.

향기로운 차 한잔과 함께 창문 밖 회색 빛 하늘을 바라보면서, 일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마치 기록 영화처럼 마음의 스크린에 비추어 봅니다. 무성영화처럼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어느 장면은 아주 천천히 어느 장면은 빠르게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은 화면을 정지시켜 놓고 한참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부분은 자꾸 되감아서 다시 보기도 합니다. 나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다시 새롭게 의미를 더하면서 잠시 상념을 붙들어 매기도 합니다.
‘그래...저런 때도 있었지.....’

모든 것을 과거의 일로서 돌이켜 볼 때, 내게 일어났던 그 많은 일들의 의미가 당시에는 몰랐던 것이 새롭게 그 의미가 더해집니다.
‘아....그랬었구나...!’

세상 만물의 모든 것들 특히,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반드시 그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고 또 그 생명이 죽은 자리엔 새로운 개체가 계속 이어지고 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더라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그 의미는 무엇일까...?’


고개 들어 바라본 창 밖에 가로수들이 앙상하게 골격을 드러내고 엷어진 태양의 온기를 향해서 애원하듯이 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한 여름 무성한 잎으로 치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던 나무는 지금 뼈만 남고 다시 성하의 계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무의 일생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서 가지가 뻗고 그 가지가 부러지기도 하고 고목이 되어 쓰러질 것입니다. 쓰러진 나무는 자기가 뿌린 씨앗에서 다시 싹이 트고 자라고 죽는 과정을 여전히 되풀이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바라보이는 나무는 아마도 태고적부터 그런 윤회를 수 도 없이 반복해온 기억을 갖고 있을 겁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에 의해 눈에 띄어 새롭게 그 소용을 달리 하게 되기도 할 때 긴 순환의 끝을 마감할 것입니다.

나무의 마지막 모습은 누구의 눈에 띄고 어떤 손길을 만나는 가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보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집을 덥혀 주는 장작이 될 수 도 있고, 멋진 탁자가 되어 향기로운 찻잔을 머리에 이고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두 아니면 짬뽕 국물에 다리를 담그는 나무 젓가락이나 이빨 사이의 고춧가루를 걷어내는 이쑤시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튼튼하게 서 있는 나무에게서 그 마지막을 미루어 보기가 쉽지 않음은 아마 우리의 인생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나무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무가 씨앗으로 있던 가지를 뻗고 있던 나무의 본질은 따로 존재하며 영원합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람의 모습은 그저 하나의 형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혼도 윤회를 거듭하면서 영혼의 승화를 위해서 잠시 삶을 빌어 옵니다. 사람은 그저 존재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삶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반복하면서 영혼은 점점 따뜻해지고 지혜로워 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수고와 노력이 충분할 때까지 기나긴 윤회를 되풀이 할 것입니다.

나무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삶도 의미의 완성을 위해서는 역시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습니다. 때로는 희망의 이름으로 때로는 고통의 이름으로 내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정으로 때로는 사랑으로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다만 나무와 사람의 차이는 나무는 그저 기다릴 뿐이지만 사람은 스스로 누군가에게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이 나무와 다른 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의 시간은 영혼의 완성을 위해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을 위해서는 나 아닌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거나,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않는 삶은, 영원히 윤회를 되풀이 할 것입니다. 서로가 가까이 다가서는 삶은 넉넉함을 느끼게 합니다. 남에게 주는 영향은 내가 준 것보다 수 배로 증폭되어 돌아 올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이 생명과 시간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함과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생명이며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월을 접으면서 새롭게 열리는 새해에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001. 12. Faunus


P.S. 내가 나무라면 나무 젓가락이나 이쑤시개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나무 젓가락이나 이쑤시개를 기억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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