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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_사랑과 지혜

등록일01-12-26 조회수105 댓글0


~~~~  마지막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들  ~~~~
(사랑과 지혜에 대한 에세이)


스무 세살 때 의학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Life After Life - Raymond Moody (삶 이후의 삶 - 레이먼드 무디) 란  책입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가 집필한 것으로서 의사로부터 사망했다는 판단을 받았다가 다시 소생한 수 백 여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실시하고 그중 진술의 일관성과 객관적인 자료 입증이 가능한 약 백 여명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책입니다. 책에는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는 과정과 사망한 후에 사후세계를 체험한 내용이 아주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은 전혀 아는 사이도 아니고, 사전에 서로 정보 교류의 기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술의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교와 교육수준, 직업, 성격 등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은 내용은 거의 비슷한 체험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 독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묘사하는 사망과 사후세계 그리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병원에 누워 있다. 오랜 투병 때문에 몸은 무척 쇠약해지고 정신도 혼란스럽다. 그런데, 요즈음은 왠지 모르게 내가 죽을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들곤 한다. 이따금 오래 전에 죽은 가족과 친구들이 꿈속에서 나를 찾아오곤 한다.

어느 날, 침대 곁에 있는 아내와 대화를 하는 도중 갑자기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는 말을 못하고 그저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고통만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다. 나는 말을 거의 못하고,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라 응급 벨을 누른다. 간호사와 의사가 뛰어 들어온다. 나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예감한다. 그러는 사이에 나의 심장은 마침내 멈추었다.

순간 나는 갑자기 편안함을 느낀다. 마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듯한 아주 상쾌한 기분을  느낀다. 아주 잠깐  머릿속이 아찔하다가 다시 맑아진다. 내 몸이 허공에 떠있는 게 느껴진다. 나는 병실 한쪽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몸’을 바라본다. 간호사와 의사는 나의 심장을 소생시키려고 전기충격을 여러 차례 시도한다. 그 옆에서는 아내가 울부짖고 있다. 난 아내에게 다가간다.

‘난 괜찮아...나 여기 있어......’  그래도 아내와 사람들은 전혀 날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의사는 ‘나의 몸’을 포기하고 마침내 사망진단을 내린다. 간호사는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처절한 모습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얼굴을 감싸 안은 채 울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아내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그런데, 내 옆에 누군가가 와 있다. 정장을 한 낯선 남자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나의 동생과 친구도 함께 와 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서 있다. 신기하게도 우리들은 말을 안 해도 서로의 생각이 잘 전달된다. 정장을 한 남자는 나를 저승으로 데려가려고 왔으며, 가족과 친구들은 나를 맞이하러 함께 왔다고 한다. 나는 오래 전에 죽은 동생과 친구를 마주 보며 잠시 서로 반가움을 나누는 사이에 의사가 나의 죽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윽고, 침대에 누운 ‘나의 몸’에 시트가 덮혀지고 아내는 흐느끼면서 간호사와 함께 병실을 나온다.

나는 저승에서 온 그들에게 둘러싸여 병실을 나온다. 신기하게도 그냥 병실의 벽을 통과하여 나온다. 병원을 나왔는가 싶었는데 어느 새 나는 푸른 초원 위에 서 있었다. 거기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 아닌 ‘영혼’들이 무리지어 있으며 어디론가 가기 위해 잠시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인솔자에 의해서 나는 그들과 함께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나는 마치 놀이기구를 타듯이 커다란 동굴같은 곳으로 빨려들어감을 느낀다. 다시 내가 주위를 둘러보니 커다란 방에 와 있다. 방의 분위기는 마치 손님을 편안하게 대해주는 그런 파티 장소 같은 느낌이다.

방의 정면에는 위엄과 인자함을 갖춘 몇몇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서, 우리들을 한 명씩 맞이하고 있다. 무슨 심사를 하고 있는 거 같다. 그 심사자들은 어딘지 따뜻한 느낌을 갖게 한다. 무언가 질문을 하기도 하고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방 한쪽의 벽면에는 대형 스크린 같은 것이 있다. 그 스크린은 평가받는 영혼이 살아온 일생을 아주 빠르게 보여주고 있다.

나의 차례가 되었다. 이름을 묻고 아까 그 스크린을 바라보게 한다. 나의 일생이 무척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다. 어릴 적, 청년시절, 그리고 장년시절의 주요 장면들이 마치 편집된 기록 영화처럼 재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이따금 부끄러운 기억도 화면에 나타난다. 내가 부끄러워하자 심사자는 말 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지금 나의 일생을 심사받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사자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내용인즉, 내가 여기 잘못 왔다는 것이다. 스크린은 멈추었고 나를 인도해 왔던 자가 불려왔다. 뭐라고 서로 이야길 하더니 다시 나를 데리고 그 방에서 나가려 한다. 더 이상 이곳은 내가 머물러서는 안 될 곳이라며 돌아온 곳으로 돌려 보내려 한다. 난, 지금의 상태가 너무도 따뜻하고 편안하여 계속 여기 있고 싶다고 하지만 그들은 나를 달래어 다시 내보내려 한다.

그리고, 잠시 후 올 때보다는 빠르게 나는 왔던 곳으로 되돌려 졌다. 아까 지나왔던 동굴을 아찔한 순간에 통과하였다. 그리고, 역시 또 잠깐 동안의 혼수상태.... 그리고 나는 다시 깨어났다. 병실의 약품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눈을 떠보니 내 머리 위에 시트가 덮혀있다. 나는 가까스로 손을 들어 얼굴의 시트를 끌어 내렸다. 그 때 남자 간호사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는 나를 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간다. 나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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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그 정황묘사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위의 내용과 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아주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습니다. 저승세계의 방에서 죽은 영혼들은 누구나 살아온 일생을 평가받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합니다. 잘한 것, 잘못한 것들을 다 보여주게 되고 그 행위에 대하여 평가를 받게 됩니다. 사소한 잘못은 대체적으로 용서받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해치거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한 행위에 대해서는 매우 분노가 섞인 질책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가를 평가받는데 있어 그 기준은 속세에서 말하는 기준이 전혀 아니란 것입니다. 재산, 명예, 권력, 큰 위업 따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죽음을 체험한 모든 사람들이 하는 공통적인 진술은 우리 삶의 평가기준은 바로 “사랑과 지혜”였다고 합니다. 즉, 일생동안 얼마나 사랑을 베풀고 살았는가 하는 것과 살아있는 동안에 지혜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대한 것이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합니다.

이승에서의 우리의 삶은 바로 영혼을 아름답게 단련하기 위한 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은 많은 의사체험자(疑死體驗子)들이 공통적으로 진술하고 있읍니다. 우리의 영혼이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고 또 우리의 영혼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추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며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이런 것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 이 글을 읽으면서 감동과 함께 상쾌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각박함과 치열함이 넘치는 세상살이에서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만이 훌륭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과 지혜로서 인생의 가치가 평가된다는 것은 얼마나 희망을 주는 말입니까? 비록 그 길은 쉽지 않고 또한 어떤 때는 잠시 미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따뜻하고 긍정적인 관심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현명함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사랑과 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동의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전투현장이라고 하며 삶은 투쟁이라고 합니다. 싸움터에서 가장 큰 덕목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나를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공격을 가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공격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공격에 대해서는 그다지 숙고하지 않으나 내가 입은 상처에 대해서는 무척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정말 이렇게 “분투해서 살아남는 것”(struggle & survive)만이 목적이라면 과연 우리의 삶은 어디에 그 진정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존하기 위해서 초조와 긴장과 바쁜 모습으로만 살아야 한다면 나중에 우리에게 축적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결국은 홀로 남은 전쟁터에서 승리의 순간을 느끼자 마자 극도의 공허감과 외로움뿐일 것입니다. 이게 과연 우리가 바라던 결과일까요?

이따금 우리의 삶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을 굴곡지게 하고 회의를 갖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좌절하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받들어 왔던 신념에 대해 회의와 수정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힘겨움도 한편 돌이켜 보면 오히려 우리의 권태와 나약함을 일깨우고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지혜란 풍요와 안락함의 시간보다는 결핍과 고통의 시간에 더 절실하게 그 의미를 더해 옵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풍요하고 너무 안락하여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게 고통과 힘겨움이 닥쳐 왔다면 오히려 그것은 축복의 시간이고 기회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시간의 한 자락을 접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해 봅니다.
그래, 인생은 정말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인생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 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저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을 베풀고 지혜를 다듬기 위해 주어진 시간입니다.
이따금 내가 삶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저는 이 말을 기억하곤 합니다.
사랑과 지혜.....우리가 죽을 때에 가져가야 할 유일한 재산이며 결국 우리 삶의 궁극입니다.


2001. 12. 파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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