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등록일0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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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부터 앞마당 백목련이 그 하얀 봉오리가 도톰하게 입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목련의 하얀 봉오리가 유난히 통통하여 수줍은 듯 벙글어 가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면서
하얀 빛에 깃든 유년 시절의 기억이 하도 고와서리 문득 그 시절 기억을 떠 올린다.
어머님은 절에 불공을 드리려 갈때마다 어린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그도 그럴것이 사천왕문을 지나갈때 마다 그곳 그림이 무섭다고 눈을 감고 주저하던
계집아이가 법당에서는 제법 으젓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래도록 참을성 있게
절하는 모습이 기특하다고 으례 절에 갈 때 마다 날 데리고 가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때가 아마 내 나이 일곱살쯤 정도 되었지 않나 추측이 된다.
어렴풋이 그 절의 넓은 마당과 나무 수풀이 생각나고,법당에서 귀여워 해주시던 어른들이
얼굴도 언뜻언뜻 떠 오른다.
갈때마다 그 절의 주지 스님이 회색 승복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던 그 알이 굵은 사탕
맛도 달콤하게 기억된다.
그날
처음으로 절 마당 한쪽에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그 나무, 하얀 꽃을 조랑조랑 매달고
서 있는 그 나무를 처음 발견하였다.
잎도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가 하얀 꽃만 매달고 있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
어찌나 근사하게 보였던지 난 오직 그 나무만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그 절이 주지스님이 가까이 닥아와 그 나무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는데
[목련]이라고 굵은 바리톤 음성으로 똑똑히 가르쳐 주셨다.
목련! 그 단어를 그렇게 처음으로 경이롭게 배웠다.
목련... 그 소리는 스님의 음성 뒤를 이어 내가 처음으로 불러본 첫 단어이다.
목련이 그 하얀 빛에 깃든 눈부심도 고왔지만
어린 내게 목련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신
그 스님이 얼굴에 걸치고 있던 안경 안에서 반짝이던 눈빛이 어찌나 맑았던지
하마트면 난 그 눈빛에 멀미를 할뻔하였다.
어린 계집아이가 느낀 감정이라 그리 대단한 것은 못되지만
그때 그 절마당에 피어 있던 하얀 목련 기억이 정말 고웁게 남아 있다.
그후,
목련은 이 나라 퍼스트레이디였던 육영수 여사님이 갑작스런 서거에
그 분이 행적을 기리면서 청와대 마당,목련 아래에서 찍은 사진을 TV로 보면서
그렇게 고운 육여사님이 자태와 목련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나는 한참 감수성이 민감하던 여학교 시절이었다.
저렇게 고운 목련꽃 아래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도 읽고 싶다는
감상적인 센티멘탈로 한참 문학적인 소녀로 거듭나고 있을 시기였다.
그리하여 목련은 나의 젊은 시절 고운 님이 되어 항상 마음에 달고 다녔다.
내가 목련을 가까이 마당에 심고 두고두고 바라다 볼수 있었던 것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시기였다.
생각도 감수성도 느낌도 젊은 날 신선한 느낌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지고 있을 시기였다.
봄마다 그 하얀 목련이 필때면 그래도 한줄기 남아 있는 떨림으로
그나마 작은 센티멘탈을 흉내낼 뿐이었다.
그 하얀 목련꽃 아래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싶다던 소녀는 어디로 가고,
허리에 군살 디룩디룩 찐 아줌마 한사람이 그저 서성거릴 뿐...
오늘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바람 한점 없고,봄 햇살 조차 한줄기 비추지 않는 날이었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마치 비가 내린 듯이 침울하고,차분하였다.
이런날 앞마당 하얀 목련을 바라다 보는 맘은 중년에 접어 들어서 처음으로
막 벙글어가는 소녀의 맘 처럼 작은 서정을 조금 안을 수 있었다.
피면 지는 꽃으로 항상 아쉬움을 안고 바라다보던 목련을 가까이 닥아가 살펴 볼수 있는
서정이 내게도 찾아왔다.
며칠전 바람이 몹씨 불던 날은 하얀 목련꽃이 바람에 찢기울 듯 날리어
머리를 풀어헤친 작부의 모습으로 바라다 보기가 그리 좋지 못했다.
항상 그 이미지 좋은 느낌으로 바라다 보던 목련이었건만
그날 마침 어느 작가의 장편소설에 등장한 목련도 허리끈 풀어헤친 작부의 모습에 비유한 글을
읽은터라 그리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다.
정신 없이 불어온 바람으로 그 하얀꽃잎 끝부터 누렇게 바래기 시작하여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차라리 아니 본 것만 못했다.
마치 봄바람 난 유부녀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도 차분한 날씨땜 고고하고 우아하여 마치 귀부인이 나들이 나온 듯이
바라다 보는 눈길도 조심스러웠다.
가까이 닥아가 그 하얀 꽃잎 끝에 코를 매니 그윽하게시리 번져 오는 향기가 기분이 좋았다.
피면 지는 꽃,
그 이름 목련.
피고 질때 차라리 바람만 불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자마자 지는 꽃으로 그 수명이 너무 짧아 가슴 아프지만
질때 불어 온 바람으로 그 고운 이미지가 손상될까봐 솔직히 가슴이 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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