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 참담...그러나, 이제는....
아....어제 저녁에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가 일을 저지른 거죠.
얼마전 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윈도우즈 XP를 열번도 넘게 깔았다 지웠다 하면서 이놈을 장악하겠다고 결심했죠...이제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하고는 이런 저런 파일들을 건드려 보면서 책에는 나와있지 않은 기능도 하나 둘씩 실행해 보다가 그만 중요한 파일들이 들어 있는 폴더를 몽땅 지웠습니다.
그 폴더에는 지난 몇년간 제가 적었던 글과 메모와 메일들이 잔뜩 있었거든요. 중요한 아이디어도 있었고, 약간은 비밀스런(?) 글도 있었구요. 그리고, 졸필로 끄적거린 시 수십편과 소설을 구상하면서 적었던 플롯과 독후감 등도 있었는데 이게 그냥 몽땅 사라진 겁니다.
거의 12메가 정도 되는 파일이었어요. 아마 출력했다면 거의 천 여페이지는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물론 윈도우즈에 복구란 방법도 있지만 제가 건드린 것은 그렇게 해서 복구되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저녁 무렵이라 약간 긴장도 늦추어진 상태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비스듯이 앉아서, 원래는 보이지도 않게 설정된 파일들을 일부러 보이도록 설정해 놓고 이것 저것 건드리다가 그만 무심코 지워버렸답니다.
마우스를 클릭 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지만 다시 휘둥그런 눈으로 바로 보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뒤 였습니다.
아...첨에는 마치 내 몸속의 중요한 장기 일부가 뭉텅 떨어져 나가는 그런 느낌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천천히 생각을 해 보았지만 기술적으로는 도저히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정말 참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 이게 무슨 일이야~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망연한 자세로 있다가 차 한잔을 들고 한 시간 정도는 그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퇴근할 무렵에는 나름대로 마음도 가라 앉히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정된 기억력을 좀 더 보완하기 위해서 인간은 메모도 하고기록도 합니다. 적절한 메모와 기록은 분명 인간의 기억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록에만 의지하다 보면 어느 새 기억력은 다른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채고 서서히 그 능력이 약화되는 것 같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거나 뼈저리게 다가오는 상황은 굳이 다른 기록이 없어도 오랫동안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수 십년 세월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말과 글들이 있을 겁니다. 첫 사랑을 만났을 때의 그 설레임과 건네었던 말 한마디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기억날 것이고, 돌아가신 분들의 마지막 모습과 힘없이 나직하게 들려주었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은 결코 기록하거나 메모하지 않더라고 아주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이별의 순간의 인사말, 어린 시절 선생님께 들었던 칭찬의 말씀, 젊은 시절 보았던 영화의 한 대사는 한 번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파일을 폴더째로 몽땅 날리고 나서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음...거기에 무슨 파일들이 있었던가....'
하나씩 짚어 나가 보다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나의 가슴을 흔들었던 글들, 내가 아주 힘들게 짜내어 썼던 글들은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중요한 부분과 글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나의 시이고 나의 소설이라면, 내게 정말로 소중한 편지라면 지금 그냥 머릿속에 그리고 내 가슴속에 여운을 띠고 남아 있는 것들 일 것입니다.
그저 많은 것을 취하려 하기 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젯밤에 잠들면서도 조금은 아쉬어 했습니다만, 오늘 아침엔 차라리 가벼운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약간은 아쉬움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파일을 잃어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매 순간마다 좀 더 절실하고 진지하고 소중하게 마음속에 담아두지 못하였던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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