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영농일지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등록일05-03-18 조회수134 댓글0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였다.
250년이상을 식민지로 일본국을 다스리고도 한푼도 보상을 하지 않은
우리나라는 사실 일본인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해야 할것이다
아래글을 일본이 우리의 식민지임을 증명하는 내용들로 퍼온글임

백제의 일본 지배
아직도 우리의 역사 교과서인 국사책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끼친 영향으로
문화적인 것만을 기술하고 있으니, 이는 엄청난 축소 왜곡인 것이다. 일본의
건국신화인 '천손강림 신화'는 사실 한반도인인 우리 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
하는 사실을 신화로 꾸민 것이다. 일본의 正史인 『일본서기』 및 『고사기』
에는 일본의 건국신화 및 고대국가 건립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 일본의 건
국신화는 '신대 상 · 하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신대 상'은 1)신대 7세, 2)팔주기
원, 3)사신출생, 4)서주맹약, 5)보경개시, 6)보검출현으로 되어 있고, '신대
하'는 천손강림 등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건국신화 중'신대 상'-2)팔주기원
편에 '담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담로는 백제의 통치기구로 일본국 기원은 담
로, 즉 백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일본의 천황이라 일컬어지는 왕들 전
부 우리 한민족의 국가인 고조선 및 부여, 백제, 가야, 고구려, 신라라는 사실
은 현재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 일본 천황가
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라고 밝히는 것을 보면,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력
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식민지 경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미루어 짐작
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 일본 열도 국가의 왕이 백제의 왕족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
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는 주객만 전도되었을 뿐 백제의 일본통치사
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국에 대한 일본 왜국의 비교적
대규모의 군사적 지원이 세 차례 있었는데,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백제 침공
시, 백제 성왕시의 위기, 그리고 백제 멸망 당시가 그것으로, 만약 왜(일본)가
백제의 식민지가 아닌 동맹관계였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특히
나663년 주류성의 함락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막을 내리자 후퇴하던 왜군들
이"아, 아, 주류성이 함락되었구나. 이제 조상의 땅을 잃었으니 어찌 찾아 뵈리
오"라고 울부짖은 걸 볼 때 당시 왜국의 뿌리가 백제였음을 확인해볼 수 있
다.  이처럼 백제의 일본통치는 강력한 것으로 본국인 백제가 위기에 처하거
나 어려울 때면 언제든지 왜에게 군사적 징발을 강요하였고, 비류백제의 통치
기구인 담로에 의하여 직접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대표적 유
물 중의 하나가 바로'칠지도'이다.
이와 같은 군사적 징발은 물론, 자기 종주국과 적대적인 나라라는 이유로 일
본은 해적으로 가장하여 수없이 신라 해변을 강탈하였다. 이는 역사서에 명백
히 나와 있는 것으로 신라는 수 많은 왜구(왜구가 일본에서 출발한 왜인이 아
니라 중국 본토 舊 백제의 식민지에서 출발한 백제 유민이라는 설도 있음)의
침탈을 받은 반면, 백제는 왜구의 침탈을 받았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 바
바로 왜에 대한 백제 통치의 작은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왜는 백제의 식민지로서 자연스런 망명지가 되고, 일시 피난처도 되었
다. 백제 본국의 세력다툼을 피하여 일시 일본으로 건너가 힘을 기른 후 다시
백제에 돌아와 정권을 잡은 동성왕, 무령왕이 대펴적인 사?다. 백제 멸망시에
는 백제 무왕의 딸이자 의자왕의 누이인 일본 열도의 제명여왕은 백제의 멸망
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여 백제에 원병을 보내기 위하여 직접 진두 지휘하
다가 사망하고, 제명여왕의 아들이 뒤를 이어 천지왕이 되자 일본 열도의 나
라 명을 '일본'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일본 열도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지배는 단군조선 멸망과 함께 이주를 시
작한 단군조선 유민이 그 기반이고, 이후 가야인의 규슈지방 이주에 의하여 기
반이 형상된 후, 백제의 담로체제를 통해 일본 열도를 고대국가로서 식민 지배
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아스카(지금의 오사카)를 중심으로 고대 국가의 틀
을 마련하고 고대 문명을 이루게 된다. 통치자의 상징인 백제식 칼과 금동제
신발 등의 출토는 백제에 의한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
다.

일본 칠지도의 진상 및 칠지도에 숨어 있는 한일관계사
일본이라는 나라가 국호를 '日本'이라고 칭한 시기는 7세기 말 경이고, 그 전
에는 '倭'라고 불리운 여러 지방정권 국가 단계였다. 그들의 종주국이자 모국
인 백제가 멸망하자 비로소 한반도와의 단절을 꾀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꾸미
기 위해서, 한반도 특히 백제에 종속적인 역사에서 탈피하고자 일본의 중앙통
일정권이 완전 허구로 꾸민 역사서가 『일본서기』라는 것은 주지없는 사실이
다. 나라의 정통성과 통일성을 필요로 한 명치유신(메이지 유신) 이후에 나라
의 주체성과 역사성을  억지로 조작한 일본서기는 왕권강화와 군국주의에 의
한 팽창주의에 적당한 근거가 되어, 이후 일본은 『일본서기』에서 자기의 역
사 및 우리의 역사를 억지로 꿰맞추는 제2의 역사 왜곡을 시행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태왕릉비문의 변조'와 '칠지도에 대한 왜곡 작업'이다.

일본 건국신화에 의하면 사신(四神) 중 하나인 스사노오(소전오)가 8개의 머리
를 가진 뱀을 죽이고 그 뱀 속에서 끄집어낸 보검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이
보검은 천황가에 대대로 내려와 천황의 상징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환란 중
에 그 보검을 분실하였는데, 천황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명치시대에 이 보검
을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 그 보검이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전설을 듣고
는 이것을 찾으라는 밀명이 천황가로부터 떨어졌다. 여기서 찾은 것이 다름 아
닌 칠지도였다. 그러나 이를 찾은 간마사토모는 여기에 새겨진 명문이 자기들
의 필요성과는 엄청나게 틀리다는 것을 알고 긁어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
고는 오히려 엉뚱한 해석을 내려 백제가 왜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여 그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 많은 일본학자는 물론 우리나라 및 중국의 학자들
에 의하여 기존에 주장하여 온 이러한 주장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그것
은 자신들 편의대로 끊임없이 고집하는 주장으로 아직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
고 있다.

이 칠지도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어 칠지도라 일컫게 되었는데, 이 일곱가지
는 백제의 일곱 나라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
게도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그 명문 중 '태화'아는 연호가 문제되었는데,
예전의 일본인 학자들은 이를 중국 동진의 연호 '태화'라고 주장하였다.
즉,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가 왜왕을 위해 만들어 백제왕을 통하여 왜
왕에게 하사한 것이다'라고 해석하여, 왜의 백제에의 종속국임을 부정하게되
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현재 일본의 고대 역사관은 그
들의 고등학교 등 국사 교과서에 확연히 드러나 있다. 그들은 『일본서기』의
편찬과정에서 백제 등 우리나라와의 종속관계를 극력 부정하고, 반대로 중국
과의 직접 교류를 강조함으로써 애써 일본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
중적 역사관을 가지게 된다. 즉 '동북아의 문화 및 군사대국이었던 중국과는
문화교류가 있었지만, 한반도로부터는 일체 유입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반도와 동등 내지는 우월하다'라고 교묘히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일본은
『일본서기』를 쓸 당시 일본의 역사가 백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 역사였으므
로 이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백제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 내에서의 역사적
활동을 일본의 활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백제가 가여 지방을 지배하였던 것
을 일본이 가야를 지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은 한반도 국가들보다도 나은 국가임을 강조하고자 지속적으로 역사를 왜
곡해 정통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침략행위로 많은 아시아 민족을 고통과 참담 속에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의 대동아 전쟁이 오히려 아시아 국가들을 서구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해방시
키고, 근대화 발전을 이루게 한 전쟁이라고 합리화시키면서 끝내 반성을 안하
는 일본의 민족성은 이러한 역사성에 의거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민족은 지속
적으로 역사를 왜곡시키는 불가사의한 민족이 되어 버렸다.그러므로 경제대
국, 소위 말하는 선진 강대국이지만 국가의 대외정책, 국제사회 기여도와 국가
이념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제 사회로부터 외면당함은 물론, 일본의
군비확장에 대해 모든 아시아 국가가 우려하고 있다. 일본이 그만한 힘을 가
진 나라로서 값어치를 못하고 덩치만 커서 위험한 어른 대접 밖에 받지 못하
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부터 일본은 역사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며 왜곡시키는 민족이기 때
문에 그 국가 및 민족 이념의 근원(根原)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다른 국가들
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여도 시정되지 않는다.왜곡하는 역사관이 그들의 원초
적인 역사관이기 때문이다.

칠지도가 왜국에 전해진 시대는 백제가 중국 본토 동북부 해안 등을 식민지
로 두어 동진이 백제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이같은 주장
은 허무맹랑할 수 밖에 없으며, 일본의 전통적인 역사관을 인식하면 쉽게 이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더군다나 이 칠지도를 처음 발견하여 왜곡된 설을 전파
한 간마사토모는 일본 군국주의 시기에 역사왜곡에 깊이 간여한 인물로서, 그
러한 이가 일본에 치욕적인 칠지도의 명문을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기 때문이
다.
여기서 또 하나 살펴볼 것은 전통적인 일본 왕가의 보검 및 그 유래 또한 한반
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
반도인의 일본 정복사를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의 소전오와 검은 한
반도인, 특히 가야인의 일본 열도로의 철 문화 전래 사실을 신화적으로 묘사
한 것에 불과하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역사에 왜곡을 가하고, 또 다시 근세에
이르러 왜곡을 가하게 되는 역사 왜곡의 전통성을 보여주고 있다.정확히 말하
여 이 칠지도는 '백제국 태자가 왜왕을 위하여 칼을 만들어 하사한 것으로, 백
제국의 왕자가 왜왕과 동격 내지는 상급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겠다. 그것은 태화라는 연호와 아울
러 태자라는 단어에 대한 것이다. 경주 출신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서
신라의 역사를 중요시하면서 고구려 및 백제의 역사를 깎아내리는 작태를 행
한 것은 주지의 사실로, 김부식은 신라의 연호 사용은 전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의 연호 사용은 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고대국가에서 연호의 독자적 사용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독립성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과 대등 내지는 우월한 관계에 있었던 삼국시대 및 그 이전에는 연호를 사
용하였다.그 이후 통일신라, 근세 조선에는 이러한 사실이 없다가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황제로 칭하는 시기에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삼국시대에는 독자적
인 연호를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는 '영락'이라는 연호와 칠지오에 나타난 백제의 '태화'라는 연호가 있으며, 이
외의 고구려 태조의 연호 융무, 장수태왕의 건흥, 평원왕의 대덕, 영양왕의 홍
무, 보장왕의 개화란 연호가 기록상 확인되고 있다.

일본은 말도 안되는 지방정권의 왕들을 꿰어 멎추어 천황이라 하였다. 엄연
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고구려, 백제를 중국에 복속국화한 김부식의 작태
를 이어받은 우리의 역사관이 너무도 개탄스럽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역사서술의 기술 상 중국인들은 자기들의 통일된 국가의 왕을 '황제'라 서술
하고, 그렇지 못한 국가의 수장을 '왕'이라 불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대 국
가는 중국에 예속되었기에 왕이라 칭한 것이 아니라 통례상 '왕'이라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왕들은 황제라 칭하고, 반대로 일
본의 천황은 왕이라 칭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무령왕릉에 나타난 일본에 대한 지배 증거

무령왕릉의 발굴은 그야말로 동북아 삼국의 역사 정립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
하였던 역사적 발굴이었으나 그만큼 논란도 많았고, 졸속 발굴과 발굴 결과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많았다. 여기서 무령왕릉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살펴본다.



① 무령왕의 관으로 사용한 관목은 일본산 금송

무령왕의 관목을 분석한 결과, 일본 내 백제의 본거지인 오사카 부근 와카야
마현 고야산의 금송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야산 근처의 오사카 하비키노 포
도밭에서 소위 관음청이라는 백제 양식의 횡혈식 고분이 발견되는 등 이 근방
에는 무려 약 1000여 개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들의 부장품 중에는 무령왕릉
에서 발굴된 청동 다리미와 똑같은 것들이 있었고, 토기 또한 백제의 것이며
벽화에는 머리에 깃털을 꼽고 말을 탄 인물상인 북방 기마민족상이 나타나는
등 모두가 아예 한반도 백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근에는 백제에서 일본
으로 건너올 때 각라도에서 무령왕을 낳은 곤지왕을 모시는 아스카베 신사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최대의 규모였다고 한다. 일본의 이 지방에서 특한되는
금송으로 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 곳이 백제의 통치 지역이라는 확실한 증거
인 셈이다.

② 금동신발은 백제의 통치기구인 '담로제'의 증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금동제 신발과 똑같은 것이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
되었다. 이 고분은 왕급 무덤으로 역시 5세기 중엽의 백제 양식인 횡혈식 석실
고분이다. 또한 일본의 구마모토현 후나야마의 6세기 백제 양식 고분에서도 무
령왕릉의 그것과 똑같은 금동관모 및 금동신발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사서
『양서』 「백제전」에는"백제는 22개 담로를 두어 전체 영토를 통치하였는
데, 왕의 자제 및 친척을 보내어 다스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백
제 담로제에 의한 통치의 또 다른 확실한 증거가 된다. 또한 중국 남경 박물관
에 소장되어 있는 흑치상지 묘비에"흑치상지는 원래 백제왕족인 부여씨였으
나 흑치지방의 수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흑치로 성을 바꾸었다"고 되어 있
다. 여기서 흑치 지방은 남양군도에 있는 지명으로 『삼국지』 「위지」 〈동
이전〉에는"일본에서 4천리 밖에 흑치라는 나라가 있다"라고 하여 이를 증명하
고 있다. 여기서 '흑치'라는 지명에 대하여"원래 양자강 부근에 있었는데 옮겼
다"는 설이 있다. 이것이 맞는다면 흑치의 위치는 동남아가 아니라 양자강 양
안(월주, 주산부근)으로, 그 곳을 백제가 지배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는 별
도로'담로'라는 말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동북부 및 남부와 멀리 동남아시아에
서까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백제가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에도 '담
로'를 두어 통치하던 해상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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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외추리 381. 매곡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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